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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그곳에 있으면서

나의 IT 개발 여정

공허공자 2014. 9. 25. 15:17

사회 생활 시작은 컴퓨터 팔이 및 홈페이지 만들기 강사로 시작하였다.

우체국 계약직으로 들어갔는데
워낙 사회를 모르던 때라
그곳 어르신 등장에도 인사만 하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고 얼어 있었다.

직급 높으신 어른들이 등장하실때 아부하고 박박 기고 그랬었다면
지속되었을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2개월이라는 짧은 계약기간이 끝나고
사회에 내동댕이 쳐졌다.

집에서 놀고 있기를 몇개월...
담임교수의 추천으로
한 컴퓨터 A/S 센터에 취직하게 된다.

다마스를 끌고 다니며
정말 성실하게 근무했다.

지속되는 야근에 지쳐가며
홈페이지 개발이라는 꿈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삶의 회의가 들 즈음
그곳을 그만두게 된다.

다시 집에서 개발인가 뭔가를 꼼지락거리며 하려 했으나
고향의 지방 회사들은 경력만을 바랬다. 

집은 넉넉치 못한데
다 큰놈이 집에서만 기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하게된 일은 컴퓨터 및 사무기기 A/S 및 용품들 납품...
컴퓨터는 물론이고
신도에서 근무하셨던 사장님에게 야매로 프린터, 복사기, 팩시밀리 수리 기술을 사사받으며
각종 관공서들을 돌며 기술영업을 했다.

당시 그 회사는 미용실 두피관리 S/W를 병특 개발자를 통해 만들고
결국 배포를 했는데

몇개월 동안 급여가 밀리는 상황이 왔고
다시금 내 안의 개발에 대한 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타이밍도 타이밍이었거니와
전산과 나온놈이 이게 뭔짓인가 싶어
그곳을 그만두고
리눅스 프로그래밍 과정 직업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그 당시의 허접한 레벨이었던 HTML, CSS, 포토샵 등을 배우고
리눅스 서버에 대해서,
Java 프로그래밍 (JSP가 아닌)도 배웠는데

지금 후회되는 점은
그때 자바 시간에 나는 PHP가 너무도 좋아서
PHP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다는 것...

물론 자바 강의 총 시간 중 1/3 정도는 반 내에서 내가 1~2를 다투는 자바 영재였다.
지금은 깡통이지만...

그곳에서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고 있는 한 친구를 만나게 되고
수료할때 즈음
그친구가 먼저 서울에 가서 숙식 해결 가능한 하숙방을 구했고
그에 용기를 얻어
나 또한 고향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간다는 용기가 가장 중요했기에
당시 소유하고 있던 컴팩 노트북을 판 100만원을 가지고 (딱 3개월치 방값)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PC방에서 구직 활동을 하던 2개월차에
한 신문사에서 면접을 보자는 소식이 왔다.

지금 돌아보면 특이한 이력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었고
내 자신에겐 잘했다고 해주고 싶기도 하다.

웹에이전시나 SI업체를 가게 되었다면
동종으로 취직이 쉬워지는 장점이 있었겠지만
구직활동 하면서 어느정도의 아쉬움이지
큰 아쉬움은 아니다.

웹에이전시나 SI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것을 깨닳았기에...

작은 신문사였지만
문화일보 건물에 있었기에
처음 접했을땐 어찌나 커보였던지...

APM 홈페이지 및 CMS의 시스템 전반의 SM이 주 였고
전사적 전산이 부업무였다.

PHP의 초기단계 클래스도 어느정도 많이 썼었다.
그 클래스는 Java에서의 객체지향과는 달라 클래스라고 하기도 뭐했지만...

PHP, Linux 서버에 대해선
참 열정을 가지고 레벨도 많이 올렸던 시기였다.

근무 기간 2년이 가까워질 무렵
갑툭튀한 꼰대 한명이 나타나
꼿꼿한 성격인 내가 못마땅했는지
정리를 해버리더라.

성실함을 인정받았는지
나올때 사장이 미안하다며
몇개월치 급여와 선물까지 챙겨주었다.

한...1개월 쉬던 중
기존 신문사에서 다른 신문사로 넘어가셨던
편집국장님께서
홈페이지 관리 인원이 급하게 빠지는 바람에 나를 스카웃했다.

그 전 신문사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도 형편없는 급여는 같았지만
급여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고향은 떠나온 상태고
입에 풀칠은 해야되었기에

일단은 출동했다.

한달 하고 떠나간다는 남자 전임지가 존재했으며
이 친구가 전달해준거라곤
서버 접속 정보와 홈페이지 관리자 페이지의 계정정보가 다였다.

그 이외엔 컨텐츠 업로드 업무에 관한 A4 한장 분량의 가이드...

이게 뭔가싶었으나
일단 급한 불 꺼드리고 제대로 된 직장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1주일 정도 하다보니
서버도 해킹되어 있었던지 악성코드가 창궐하였고
다른 사람 찾아보라며 그냥 나왔다.

또하나 나온 이유라면
당시 APM에 대한 열의라던지 부심이라는게 존재했기에
Windows Server + MS-SQL + Classic ASP 기반으로 전향하긴 싫었었다.

또 한 1~2주 쉬며 다른곳을 물색중이었는데
뭐 그리 웹에이전시 경력의 3년차들만 구하던지...
갈데가 없었다.

무슨 타이밍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국장님 계신 신문사도 그 적은 급여에 일할 사람이 없다며
다시금 내게 오라고 해서
결국 지금으로는 9년 넘게 몸담게 되었던곳으로 이적하게 된다.

홈페이지 SM은 2차적인거고
쿽익스프레스로 작업된 파일들에서
한페이지 한페이지 기사 텍스트들을 모아서 웹에 올리는 컨텐츠 업로더로써의 업무가 메인이었다.

개발자가 이짓이나 해야 되다니...
이때부터였던거 같다
이곳에서 결국 '집배신'을 기획하고 만들게 된 계기가...

'기자, 그들에게 그들 업무를 돌려주자'라는 모토로
최초의 집배신 시스템에 대한 계획을 했다.

그 시스템은 나중일이고...

일단 서버의 해킹툴 심어진것과
SQL에 심어진 Injection 코드들을 청소했다.

당시 기자들은 3.5인치 디스켓으로
기사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못봐주겠더라...

남는 윈도우 PC 한대로
편집국 공유 서버를 만들었고

국장님께 디스켓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중앙 집중식 데이터 통합도 되는
공유 서버 사용법을 알려드리고
모든 기자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제작부의 MAC OS 9.1와도 Appletalk 프로토콜을 통해
네트워크 공유를 잡아줬다.

그것만으로도 사내에서 데이터 유통에서의 엄청난 개선이 되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신문사에서 내 하는 일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게 방관(?)하는 환경이었고
기술개발을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할애될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많은 것들을 능동적으로 해 낼수 있었다고 본다.

이제 내 업무와 관련된것들을 개선해야 했다.

컨텐츠를 MAC OS 9.1의 QuarkXpress 3.3에서 긇어다가
텍스트 파일로 하나 하나 만들고
내 자리로 돌아와 인텔 PC에서
그 파일들을 하나 하나 열어서
초기의 신문사 웹CMS에서 올리던 프로세스...

윈쿽을 설치하고
모든 파일들을 한꺼번에 끌어 당겨서
윈쿽에서 Copy & Paste 방식으로 바꾸어
TXT 파일 변환의 과정을 없애버렸다.

이미지 파일들은 eps 포맷으로 왔기에
jpg로 배치 변환 작업을 해야 했는데

기존엔 포토샵에서 하나 하나 액션 돌려서 변환하던 작업을
포토샵의 포토앨범 만드는 배치 기능을 통해
한번에 바꾸어 내어 공정을 줄였다.

이후 웹CMS 기사 입력기의 편의성을 강화시켰다.
이때까진 컨텐츠 업로드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어찌나 그 잡스런 일이 하기 싫던지...

1년 넘게 있다보니
기자들이 기사 입력하고
교열받고, 국장에게 OK 받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머릿속에서 좌~왁 돌았다.

그 프로세스를 이제 공용 CMS로 녹여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완성을 해 낼 즈음
네이버와의 컨텐츠 CP 계약도 따내었다.

XML로 변환한 뒤 FTP를 통해 통신하는 규약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공용 CMS에 녹여내었고

최초 버젼의 '집배신'이 탄생하였다.

나중에 다른 큰 신문사의 집배신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무것도 참고하지 않고
그들(기자들)의 프로세스를 파악한 후 녹여 만든
내 집배신 시스템이 전혀 허접하지 않음을 깨닭았다.

집배신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PT하였고
사용을 하기를 바랐으나

오프라인에만 길들여져 있는 기자들에겐
2중작업으로 업무만 늘어나는것으로 판단하여
곧바로는 실무에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블로그와 SNS들이 강화되고
온라인 저널리즘이 퍼지면서
해당 매체들로 송고하는 기능을 추가하였고
묻힐뻔한 집배신 시스템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고
작은 신문사지만 자체 집배신 시스템을 가진곳이 되었다.

자그마한 인트라넷 그룹웨어를 개발하고
집배신의 사용자 편의성 및 오프라인 기자들이 접근하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UI & UX 개선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급격한 IT의 물결은
이제 모바일로 넘어간지 3년차가 되어가고 있었다.

허접하게나마 모바일 웹페이지를 만들고

한달은 Android
한달은 iOS

Native 뉴스 앱을 맨땅에 헤딩하며 개발해 내었다.

구글 PlayStore, AppStore에 Publish 완료하고

내가 만든 모바일 프로젝트 시리즈들은
당시 모든 신문사가 그랬듯
신문 한켠에 사용 안내가 게제되었다.

모바일 웹을 모바일웹앱으로 만들어보려는 노력과 함께
jQuery Mobile과 Sencha Touch 2 버젼으로 각각 만들어 내었으며
Phonegap을 씌워 하이브리드앱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신문사 이직 전엔
Node.js + Socket.io 기술을 집배신에 적용하여
실시간 알림 및 협업성을 높였다.

낙하산의 저주로
결국 그만두게 된 9년 3개월간의 대장정...

써놓고 보니 무슨 다큐같다...

자원은 뒷받침되지 않았지만
난 능동적으로 행동했고

개발 트렌드의 시간에는 뒤쳐졌을지 모르겠으나
아둥바둥 여러가지를 따라가려 노력해왔다.

서울에서의 3번째 직장이었던 신문사,
끝이 어찌되었건
믿고 자유롭게 개발을 허락해주었던 점에서 감사한다.

보헤미안처럼 자유롭게 일과시간 사용을 해버렸던 나를 배려해주었다.
그랬기에 나의 능동성이 더 발현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이 일을 해야 되는 직장이기에 규칙은 있어야 되겠으나
성실하며 능동적인 개발/디자이너 직군들에겐
네이버에서 시행하고 있다는 책임근무제 이거 개인적으로
완전 찬성이다.

사무실 의자에 쳐박혀 머리를 쥐어짜는것보다
산책하며 아이디어나 알고리즘을 떠올리는것이
백배는 낫다고 보며

아이디어는 모두 산책하거나 내가 편하게 느끼는 곳에서
더 잘나오는것을
몸소 느꼈고, 해 왔었기에 더 그러하다.
해결되지 않는 이슈도 또한 그러했다.

창조성을 발현해야 하는 직업이라면
책임있는 자유를 주는 직장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시간 빡빡하게 주고
쪼아대는 그러한 방식의 경영은
휴지통에 고이 접어 버려버리는 기업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로하여
행복한 자신, 행복한 일터, 행복한 회사, 행복한 사회로 넓혀졌으면 한다.

끝으로...
Java나 C# 등 객체지향 언어들으로 빨리 넘어왔더라면...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항상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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